마가목주 / 김광규
밋밋한 오르막길에 마가목* 한 그루 눈에 띄었다 주전골 내려오며 우리는 마가목 열매로 담근 술 이야기를 했었지 설악산 쏘다니다 보면 감자전 부치는 산골 주막에 들러 한번 맛볼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럴 기회도 오기 전에 그 친구 췌장암으로 세상을 등졌고 나는 이제 산을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여생의 내리막길 타박타박 걸어가면서 아직도 마셔보지 못한 마가목주 그저 이름만 기억하고 있을 뿐 *한자로는 馬牙木이라고 씀.
남몰래 흘리는 눈물 / 김광규
수술을 며칠 앞두고 환자를 격려하려 찾아온 중학교 때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먹고 헤어졌다 안국역에서 3호선 전철을 타고 떠나가는 늙은 친구들 배웅하고 돌아서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슬퍼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혹시 앞서가게 되더라도 제각기 살아남아 각종 세금과 건강보험료에 시달리며 지저분한 잔반殘飯을 치워야 할 그들이 문득 불쌍해져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었다
바로 그런 사람 / 김광규
맞아 방금 떠올랐던 생각 귓전을 스쳐 간 소리 혀끝에 감돌던 한 마디 그것이 과연 무엇이던가 그래 그것이 맞아 틀림없어 참으로 기막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할지 달리 바꾸어 말할 수도 없고 글로 옮겨 쓸 수도 없는 바로 그것을 어떻게 되살려 낼까 궁리하다가 평생을 보낸 사람.
발췌_ 김광규 시집_그저께 보낸 메일_문학과지성 시인선 580_2023년
<저작권자 ⓒ 리더스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Opinion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