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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마이웨이] 눈물겹도록 슬픈 일이 있다면 .

김홍성 | 기사입력 2024/05/05 [07:51]

[김홍성 마이웨이] 눈물겹도록 슬픈 일이 있다면 .

김홍성 | 입력 : 2024/05/05 [07:51]

▲ 김홍성 시인, 작가, 예술가 [사진=리더스인덱스]  ©


[김홍성 마이웨이] 눈물겹도록 슬픈 일이 있다면

.

플라타너스 길을 따라 통학하던 생각이 난다. 학교에 오갈 때 버스나 합승을 타기도 했지만 걸어 다닌 날이 더 많았다.

아침을 먹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갈라치면 편두통이 엄습했기 때문에 명랑 또는 뇌신 곽에서 가루약을 한 첩 꺼내 입안에 털어 넣고 집을 나섰다.

 

 

원서동 고개에서는 왜정 때 순사들처럼 금색 단추가 반짝이는 검정색 교복에 교모를 쓴 상급 학교 학생들이 무섭도록 빠른 걸음으로 징 박은 구둣발 소리를 내면서 몰려왔다. 나는 주눅이 들어서 길 가장자리로 걷다가 넓은 돈화문 앞마당에 이르러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만나면 안심이 되곤 했다.

 

 

종묘로 넘어가는 육교 밑을 지나면 내리막길, 내리막길 끝에서 만나는 사거리에서 발길을 창경궁 쪽으로 돌려 홍화문 앞을 지날 때쯤이면 가끔 변이 마려워서 길 건너편에 있는 공중변소 에 들르기도 했다.

밤새 비가 쏟아지다 그친 가을 날 아침에는 혜화동 로터리에 이를 때까지 플라타너스 젖은 낙엽들이 발길에 채였다.

 

 

늦가을 어느 날에는 등교 중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더니 세찬 소낙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홍화문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느라 지각을 했다. 기왕 늦었으므로 불어오는 바람에 젖은 옷을 말릴 겸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뭔지 모를 향수를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를 맡았다.

담배 냄새였다. 그 냄새를 놓치지 않으려고 내 앞에서 빈 지게를 지고 걸어가며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교문 앞을 지나고 학교 담벼락 모퉁이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골목 안에는 우리 학교로 갓 전학 온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제는 내가 돌쟁이 때부터 2학년까지 살았던 동네의 ‘OO상회애들이었다. 부모는 시골에서 장사를 하고, 조부모가 손자들을 데리고 서울로 나온 것이었다.

학교에서 그 형제를 우연히 만난 날, 나는 그 애들이 사는 작은 한옥에 따라갔었다. 밥상이 나오는 바람에 얼결에 밥도 같이 먹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무난했는데, 밥을 엄청 빨리 먹는 내가 한 공기 더 달라고 한 게 문제였다. 걔네 할머니가 당황해 하면서 밥이 없다고 했다. 미안하고 무안해서 다시 찾아가지 못한 집이 그 집이었다.

 

 

그 집 대문이 저만치 보이는 데서 돌아섰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빗물이 질질 흐르는 길바닥이 왜 그리 슬프던지. 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혜화동 로터리로 나와 성균관 대학교 어귀쯤에서 개피 담배 한 개와 성냥을 샀다.

터덜터덜 걸어서 창경궁 홍화문 건너편 공중변소로 갔다. 공중변소 앞에 죽은 강아지들처럼 널브러져 있는 플라타너스 낙엽은 또 얼마나 슬프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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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터덜터덜 걷던 이 기억은 재수생 시절에 처음 접한 박봉우 시인의 시 가로(街路)의 체온을 읽으면서 다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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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의 체온 / 박봉우(193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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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겹도록 슬픈 일이 있다면

그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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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동 종점행 합승을 타면

창경원 앞에서 시작하는

플라타너스 그늘에

누군가의

따순 손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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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피곤한 하루라도

걸어가고 싶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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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이라도

흘러가고 싶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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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하는 사람을

고향에 두고

빈 가슴으로

빈 가슴으로 걸어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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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머언 길 위에도

비로소

시인을 알아주는

애인의 맑은

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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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는 길 위에

버림받은

나는, 어쩌면

순진한 부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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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겹도록 외로운 일이 있다면

통행금지 몇 분을 두고도

이 길을 걸어가는

밤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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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 정음사, 1957>>

 

▲ [사진=김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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