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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마이웨이] 하디 가웅의 보리수

김홍성 | 기사입력 2023/03/26 [15:48]

[김홍성 마이웨이] 하디 가웅의 보리수

김홍성 | 입력 : 2023/03/26 [15:48]

▲ 김홍성 시인, 작가[사진=리더스인덱스]  ©


[김홍성 마이웨이] 하디 가웅의 보리수들은 4 월에도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온 마을 꽃나무들과 화초들은 벌써부터 꽃을 피워서 벌 나비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하디 가웅에서 가장 크고 우람한 나무인 보리수들은 우중충한 모습으로 서서 묵은 잎사귀를 떨어드리고 있었다.

 

아름답고 화창한 봄날일수록 보리수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죽은듯한 보리수들에게 날마다 경건한 기도를 바쳤다. 꽃과 물과 불을 가져와 치성을 드리고, 떨어진 낙엽을 곱게 쓸어냈다. 무명실을 가져와 친친 감으며 식구들의 무병장수를 빌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권총을 차고 순찰 나온 경찰관도 하디 가웅 연못가 보리수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고 있었다.

 

예전에 우리나라 계방산 기슭에서 만났던 한 심마니 노인은 말했다. 큰 나무들이 늦게야 새잎을 다는 것은 작은 풀과 작은 나무들을 위한 배려라고. 만일 큰 나무들이 먼저 새잎을 달아버리면 그 그늘에 뿌리박은 작은 나무들과 작은 풀들은 햇빛을 못 봐서 싹을 틔울 수 없다고.

보리수는 아무리 어려도 '큰 나무'. 느티나무나 망고나무 같은 다른 큰 나무들은 어느새 새 잎을 달고 푸르게 서 있는데 그런 나무들보다 체구도 작고 구부정한 어린 보리수는 어른 보리수들처럼 나목인 채 버티고 있었다.

 

권총을 찬 경찰관도, 짐수레를 밀어주는 품팔이 노동자나 청소부도 보리수 앞을 지나갈 때는 갑자기 딴 사람이 된 것처럼 합장을 하거나 머리를 숙이는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5 월이 되면 하디 가웅의 보리수들도 귀여운 새 잎사귀들을 내밀기 시작한다. 아직 비가 오지 않는 5 월에 보리수들이 목을 축이려면 어린 잎사귀 끝에 밤이슬이라도 모아야 한다.

 

이른 아침 동 틀 때 보면 보리수 어린 잎사귀 끝에 방울방울 이슬방울이 매달려 있다. 보리수는 이렇게 모은 이슬방울로 제 몸 구석구석에 자라는 난초와 이끼를 비롯한 여러 더부살이 식물들을 키운다.

하디 가웅 연못가 보리수 그늘은 버림받은 수송아지들의 거처이기도 하다. 다 자라면 젖이 나오는 암송아지는 주인의 총애를 받지만 에미 젖만 축내는 수송아지는 일찌감치 거리로 내쫓긴다. 네팔에서는 소를 도살하는 게 금지되어 있지만 내쫒는 것마저 금지되어 있지는 않다.

 

하디 가웅의 버림받은 수송아지들은 쓰레기장에 쌓이는 플라스틱 봉지를 터뜨려서 그 속에서 나오는 콩 껍질이나 밥알이나 무 꽁다리 같은 걸 먹는다. 밤이 되면 보리수 밑에 모여서 잔다. 그리고 아침이 되기 무섭게 다시 쓰레기장으로 달려간다. 간혹 거리의 개들과 먹이를 다투기도 한다.

 

송아지들이 개떼들에게 쫓겨서 경찰서가 있는 큰 길로 달려가는 걸 여러 번 봤다. 거긴 차들이 씽씽 달리는 곳이다. 어느 날은 그 송아지들이 우리가 사는 좁고 긴 골목 안으로 들어왔었다. 골목길 담 밑을 따라 자라는 풀을 뜯으러 들어온 것이었다.

 

송아지들은 그날 운이 좋았다. 골목 끝에 사는 아주머니 한 분이 송아지들을 보고 쯧쯧 혀를 차더니 더히(발효시킨 소 젖)를 가져다 그 놈들에게 먹였다. 젖 얻어먹는 수송아지들의 표정은 어쩌면 그렇게 어미 품에 돌아온 어린애 같던지…….

네팔에는 짐승을 자기 새끼처럼 여기는 아주머니들이 참 많다. 그리고 그런 아주머니들은 날마다 보리수에 이마를 대고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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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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