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도착한 시집을 여기저기 펼치면서 읽는다. 어느 한 작품 무심하게 넘길 수가 없다.
시골 출신이되 고향다운 고향을 갖지 못한, 아니 고향다운 고향의 그림조차 제대로 그려 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의 어정쩡한 삶은 그의 시들이 뿌리내린 '대지의 상상력' 앞에서 그지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각박한 도시의 거리에서는 윤중호도 벌어 먹고 살아야 했던 한낱 소시민. 윤중호 자신의 시적 자화상을 노래했다고 여겨지는 연작시 <靑山을 부른다>를 읽는데, 거기 박힌 시인의 외로움이 표창처럼 얼굴로 날아와 소름을 돋게 만든다.
참 소름 끼치게 외로웠겠구나 덧정 없는 세상의 옷을 벗어버리고, 돌아와 낯선 골방에 앉을 때마다…… 30촉짜리 백열등에 흔들리는 저 그림자가 靑山이었던가? ― 「청산을 부른다 15」 전문
시인 윤중호가 마주했던 ‘덧정 없는 세상’은 어떤 것이었던가. 다시는 되풀이 살고 싶지 않은 이 망가진 세상으로부터 그가 돌아가고자 했던 진정한 세상으로서의 고향은 이제 영구히 회복 불능이자 도달 불능인가. 그 절망 앞에서 그도 결국 술꾼이 되어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가.
몸이 아프다 내가 알고 있던 주량酒量과 내 몸이 지탱할 수 있는 주량이 자꾸 벌어져서 다음날 대낮까지 허우적거린다. 내가 살아가리라 했던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의 온갖 게 엇물려 세상이 내 속에서 들끓고 내가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찬 서리에 땡감은 익어가는데 떫게, 더 떫게 입맛을 다시는 겨울 아침. ― 「술노래」 전문
시인이 작고하고 난 이듬해 유고시집 <고향길>(2005)이 나왔고, 여기에 그의 대학시절 스승이자 그후 의논 상대하며 동지가 되었던 고 김종철 선생이 발문을 달았다. 꽤 오래된 글인데도 바로 오늘 쓴 것처럼 생생하게 읽힌다.
저 세상에 만난 두 사람이 이 난세를 내려다보며 뭐라고 탄식을 할지, 떫게 입맛 다시는 겨울 아침, 그래도 김종철과 윤중호가 남겨놓은 활자들을 읽으며 생(生)의 유한과 유한한 생 안에서 건져낸 생각들의 깊은 무한에 조금은 위로를 받는다. (염무웅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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