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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웅 중구난방] 하멜 표류기와 조선의 도자기:리더스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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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웅 중구난방] 하멜 표류기와 조선의 도자기

김대웅 | 기사입력 2023/02/26 [14:25]

[김대웅 중구난방] 하멜 표류기와 조선의 도자기

김대웅 | 입력 : 2023/02/26 [14:25]

▲ 김대웅 작가, 묺화평론가 [사진=리더스인덱스]  ©


[김대웅 중구난방] 1653618<네덜란드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스페르베르호(Sperwer; Sparrow Hawk)는 바타비아(Batavia; 현재의 자카르타. 원래는 1795년에 프랑스 혁명군이 네덜란드에 세운 공화국. 네덜란드가 자카르타를 점령하면서 그 이름을 붙였다.)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816일 제주도에 불시착했다.

 

선원 중에는 23세의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도 있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이들은 1627(인조 5)에 이미 하멜과 비슷한 경로로 표류하다 조선에 귀화해 <훈련도감>에서 일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 박연[朴延])의 통역으로 효종의 호위부대원으로서 체류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하멜은 적응하지 못하고 몇 차례 탈출을 시도하다가 불발로 끝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새로 부임한 관리가 이들에게 온갖 부역을 시키자 노예 같은 삶에 지친 하멜 일행은 다시 탈출을 감행했다. 마침내 166694일 그들은 조선인에게서 산 배를 타고 탈출해 여러 날을 항해한 끝에 일본에 도착했다. 

 

조선에서 1320일 동안 붙들려 있다가 탈출한 헨드릭 하멜 일행은 8일 나가사키 앞 고토섬(五島列島)에 다다랐다가 14일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出島商館)>에 도착했다. 당시 상관장(商館長; 일본어로 카피탄인데, 영어 Captain의 포르투갈어 발음이다.)은 빌럼 폴게르(Willem Volger)였다. 하멜은 그곳에서 1년 이상 체류하면서 조선에 억류되었던 날들을 정리했다. 이들은 16671128<네덜란드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하멜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남고 나머지 일곱 명은 그해 1223일 고국으로 떠났는데, 그 일행에게 자신이 정리한 일지 복사본을 보냈다. 

 

하멜 표류기에는 당시 조선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효종의 이야기, 청나라와의 관계, 백성들의 삶, 군사 체계, 종교적 관념 등이 실려 있다. 이 책은 1688년 영어로도 출간되어 유럽인들에게 소개되었는데, 그 책에 서술한 내용은 왜곡된 것도 많았으나 외국인 입장에서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을 것이다. 미지의 나라 조선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유럽인에게 처음 소개한 그 복사본이 네덜란드에서 책으로 출간되자 이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그 후 50년 이상 판을 거듭해 출판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한 건 올리고 싶었던 무역상들과 군인들이 크나큰 호기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13년간의 조선 체류기인 하멜표류기. 원제는 아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호 생존 선원들이 코레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816일 난파당한 후 1666914일 그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떄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대해서이다. 영어 제목은 Hamel’s Journal and Description of the Kindom of Korea, 1653-1666.

 

1636년에 건설된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은 외국인들이 내국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공섬으로 만든 외국인 거주지였다. 1639년까지 포르투갈 상인이 이용했으나 기독교 선교금지로 1641년부터 사용권이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하멜에 앞서 네덜란드에 도착한 일곱 명의 선원은 동인도회사 관리들에게 조선의 현황, 무역할 품목 등을 설명했다. 이들은 조선에 일본처럼 상관을 설치해 직접 교역하면 큰 이득을 볼 것이라고 조언하고, 이를 위해 함대를 파견한다면 자신들도 자원하겠다고 말했다. 동인도회사는 무엇보다도 도자기에 주목했다. 당시 유럽인은 중국산 도자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대항해 시대 이전에 중국 자기는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전해졌지만, 유럽인이 동아시아 교역로를 열면서 직접 도자기를 저렴하게 수입했다. 

 

중국 자기는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웠는데 유럽에서는 당시 그만한 온도까지 열을 올릴 기술이 없었다. 유럽에서는 600~800도에서 굽는 토기와 800~1000도에서 굽는 도기를 생산했지만, 두드리면 둔탁한 소리가 나고 물을 흡수했다. 이에 비해 1300~1400도에서 굽는 중국산 자기는 고급 점토에 유약을 발라 구웠기 때문에 표면이 곱고 두드리면 금속 소리가 나고 물을 흡수하지 않았다.

  

중국산 도자기는 동양 무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먼저 수입했지만, 1세기 후에 네덜란드가 이 무역로에 참여하면서 유럽에 중국 자기 열풍을 일으켰다. 네덜란드는 1612년에 배 한 척이 난징에서 38641점의 자기를 암스테르담으로 운반한 뒤 2년 만에 그 양이 두 배로 늘었으며, 1639년에는 366000점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1643년 청나라가 남하하면서 해금(海禁) 정책을 시행하는 바람에 네덜란드는 중국산 도자기를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네덜란드가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조선이었는데, 때마침 데지마 상관의 보고와 하멜 표류기등을 종합해 조선에서 고급 도자기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이 매력 있는 도자기 수입 대체국으로 떠오른 것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하멜 표류기에 자극을 받아 즉시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했다. 하멜이 조선을 떠난 지 2년 뒤인 1668822일 네덜란드 정부는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와 데지마 상관장에게 조선과 직교역하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내용의 훈령을 내렸다.

  

코레아는 육로와 베이징과 통상하고 있다. 우리가 코레아에 갖고 갈 상품을 운송해주면 운송료를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 코레아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데, 중국의 방해가 우려된다. 그래서 코레아에 직접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듬해인 1669년 동인도회사는 1000톤급의 상선에 코레아(Corea)’라는 이름을 붙였다. 코레아호는 조선과의 직교역을 성사시키기 위해 167061일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하지만 코레아호는 일본의 훼방으로 바타비아에서 조선으로 향하지 못했다.

  

데지마 상관장의 회신에는 대마도주가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데 일본은 네덜란드의 개입을 원하지 않으며, 네덜란드가 일본의 요구를 어기고 조선과 직교역에 나선다면 일본은 데지마 상관을 폐지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조선과의 직교역을 중국이 반대할 경우도 고려해야 하며, 조선의 외국인 배척도 문제이고, 조선에 적당한 무역항이 없다는 점도 들었다. 동인도회사의 입장에서도 조선과의 불투명한 무역로를 개척하기보다는 오랫동안 상거래를 유지해온 데지마 상관을 유지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 본부는 그 보고에 따라 결국 조선으로 항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중국 도자기의 수입 길이 막히고 조선과의 무역로 개설마저 실패하자 유럽인들은 일본 도자기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도자기의 유럽 진출이 시작되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경덕진(景德鎭)을 비롯한 도요지가 초토화되어 수출길이 꽉 막히자, 무역선들이 규슈로 줄줄이 몰려들기 시작해 가고시마는 도자기 수출로 일약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1710년 독일 마이센에서는 작센 선제후의 원조로 동양 자기를 모방해 독자적인 자기를 개발하게 되었는데, 그 청화 양파 문양이 조선의 청화백자를 꼭 빼닮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공의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어, 그곳에서 이를 모방한 것이었다. 조선은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지 못했지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후예가 유럽 자기의 뿌리가 된 것이다.

 

                                             심수관 박물관에 있는 백자 히바카리’.

 

일본 자기의 원조는 물론 조선이다. 그들은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공주 출신 이삼평(李參平, ?~1656)) 등 수많은 도공을 납치해 갔다. 그는 일가족 18명과 함께 규슈 사가현 아리타에 도향(陶鄕) 아리타의 역사를 열었고, 이후 일본의 도자기 기술과 생산량은 조선 도공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번청(藩廳)이나 동인도회사가 주문한 고급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사쓰마 도자기의 핏줄 심수관가(沈壽官家; 일본 사쓰마도기[薩摩燒(살마소)]를 창시한 심당길 이후 15대조 가문을 총칭하는 용어)1대조 심당길(沈當吉)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로 끌려갔는데, 그때 고향 전라도 남원에서 흙과 유약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가 만든 백자가 바로 오로지 불만일본 불로 구웠다고 해서 붙여진 히바카리(火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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